daily life

190518 토_관건은 지구력이다

微物의 숨소리 2019. 5. 21. 17:00

P에게 전화하는 꿈을 꿨다. 공중전화를 보고 반갑게 달려갔는데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여러 번 시도한 끝에 겨우 통화에 성공했다. 현실에서는 늘 실패만 했는데. 공중전화가 있으면 시간대가 안 맞았고 시간대가 맞으면 공중전화가 없었다.


전날 나는 꽤 늦게까지, Y는 꽤 많이 마신 관계로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났다. 오늘은 외가쪽 저녁 모임이 있는 날이다.

10시쯤 아침을 먹고 Y와 함께 마트로 갔다. 두어 달 전부터 제발 염색 좀 하면 안 되겠냐고, 가족 모임이 있기 전에 염색을 하면 단정해 보이고 얼마나 좋겠냐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채근해온 그였다. 딱 한 번은 해 보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딱 한 번이 오늘이었다. 최근 들어 머리를 짧게 자르는 건 어떻겠냐는 새로운 요구사항이 더해진 터라 염색과 커트 중 뭐라도 하나 빨리 처리해야 했다.

진열대에서 염색약을 고르고 있자니 세비야에서 티로와 서로 머리를 염색해 주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를 기념할 겸 빨간색으로 염색하고 싶었는데, 무난한 색깔들밖에 없었다. 그나마 붉은 빛이 도는 염색약을 들고 숙소로 돌아간 시간은 12시 전후. 설명서를 유심히 보던 Y는 나를 변기 위에 앉히고는 장갑을 끼고 염색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정성스럽고 꼼꼼한 손길이었다.

지난 10년 간, 도대체 왜 염색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루하루 늙어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늙는 나를 받아들이려고 해" 라고 설명해 왔는데 어느날 문득 제대로 대들지도 못하고 고분고분하게 머리를 맡기고 있자니 전날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는 성적 판타지 운운하며 Y를 폄하했었다. 그렇지만 차갑고 메마른 겨울 땅 같은 내게는 그의 뜨거운 몸짓이 고맙고 반갑다. 불길에 타서 흔적도 없이 바스라지더라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거품을 머리에 인 채로 30분쯤 있으니 머리가 따가워졌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헹구고는 곧바로 어머니와 남동생을 만나러 나갔다.

가족 모임이 있는 식당 근처 커피숍에서 헛도는 대화를 한 시간쯤 하고 나니 동생 부부가 왔다. 사람이 늘어나자 대화는 더 헛돌았다. 무심한 듯 건네는 말들 속에 밉고 한심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남동생이 모를 리가 없다.

고초를 겪고 얼마 전에 세상에 나온 사촌 동생을 환영하기 위해 조직된 가족 모임은 성황이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몹시 어색했다.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와인과 소주와 맥주를 손 가는 대로 집어서 들이부었다. 흘깃 보니 동생들은 소주를 들이붓고 있었다.

모임이 끝나는 대로 심야 버스를 타고 내려가겠다던 어머니는 숙소로 가자는 말에 쉽게 설득 당하셨다. 다른 친척들이 모두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우리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지막 팀을 배웅하고 나서 동생네 부부와 헤어져 숙소로 갔다.

숙소는 몰라보게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Y는 급히 맥주를 사러 나가고 없었다. 좁지만 잘 정돈된 공간을 보고 어머니는 내심 안심하시는 것 같았다.

셋이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졸음을 참지 못한 나는 12시쯤 술상 옆에 고꾸라졌다. 방에 들어가서 자라며 흔들어 깨우길래 눈을 떠보니 새벽 2시였다.


늘 최선을 다하는 그. 그런 그를 나는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동생 말대로, 이 관계는 내 지구력이 관건이다